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처인성 전투 (문단 편집) == 처인성 == 처인성은 위에도 언급했듯이 자그마한 토성이었다. 거기다 처인성이 위치한 지역은 바로 [[천민]]들의 거주지, 처인부곡(處仁部曲)이었고 성 안에 피난해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정규군이 아닌 [[용인시]] 일대 수령들이 이동시킨 약간의 병력과 백성들[* 이들 합이 총 10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], 그리고 [[김윤후]]를 비롯한 [[승려]] 100여 명과 다수의 부곡민들이었다.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될 싸움이었지만 [[살리타이]]가 공격을 감행한 이유는 그곳에 있던 군량창고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. 사실 처인성 전투 자체가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여 벌어진 사건이었다. 원래 [[살리타이]]의 목표는 [[광주시|광주]]를 점령하여 남부 지방으로 항하려 했는데, 막상 광주에서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진로를 [[용인시]]로 바꾸었고, 막상 또 용인에 와 보니 주민들은 전부 피난가고 빈 성만 있었고, 그러다가 인근 처인성에 군량 창고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리로 향했는데, 막상 처인성에 소수의 천민들이 피난해 들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분풀이 대상으로 삼고자 공격한 것이었다. 사실 [[용인시]]의 주 방위산성은 처인성이 아니라 보개산성[* 길이 약 750m, 봉수대까지 있었다.]이었다. 이미 귀주와 광주에서 한번 뜨끔하게 데인 [[살리타이]]는 그냥 공성전을 포기하고 지나가려는 찰나 처인성이라는 작은 토성에 군량창고, 거기다 수도 얼마 안 되는 부곡민들이 들어갔다는 정보에 싸움을 건 것이니 애초에 싸움을 매우 쉽게 보았을 것이다. [[살리타이]]가 처인성에 도달하고 본대에서 500여 기의 기병을 직접 차출해 처인성 동북쪽의 완장리, 매룡리 일대를 점령해 포위공격을 할 준비를 시작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